소개글

우리에게 기록은 무엇인가?

 

기록학의 토대를 마련한 대표적인 학자 쉘렌버그(Theodore R. Schellenberg, 1903~1970)는 업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록이 행정적 가치와 재무적 가치, 법적 가치(1차 가치)를 지니며1) 기록 생산 이후에는 역사적, 문화적, 연구적 가치를 동반한 증거적 가치와 정보적 가치(2차 가치)2) 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록이 다방면의 기능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접합하며 현재 우리의 삶과 관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사회 내 폭 넓은 예술 실천과 그에 따른 생산 과정을 내재한 예술 기록은 특정한 사건에 대한 증거이자 정보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작가의 초기 활동과 작품 생산 과정, 창작 과정에 참여한 협력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며, 기록물에 담긴 미적·연구적 가치를 드러낸다. 이러한 기록은 기록자들의 실천과 연구를 통해 과거의 먼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도달한다. 

     먼저 우리에게 다소 멀리서 생산된 기록과 그에 관한 연구가 우리에게 도달한 사례를 살펴보자. 미술사가인 아비 바르부르크(Aby Moritz Warburg, 1866~1929)는 호피족의 춤 제의, 뱀 의식(Schlangenritual)에 대한 현장 연구에서 출발하여, 〈모키족의 모래 그림〉(1891)3)의 번개 도상과 결합한 뱀 형상, 〈춤추는 다이나데스〉(1 B.C)의 마이나데스(Maenades)4)가 몸에 두른 뱀, 〈라오콘〉(A.D 27~A.D 68)에서 인간에게 내려와 신벌(神罰)을 집행하는 뱀 형상, 〈청동 뱀과 모세〉(1761)에서 등장하는 용서와 회복을 상징하는 구리 뱀, 더 나아가 뱀과 번개의 공포를 잊고 고대 건축 양식을 모방한 건물 앞을 지나가는 미국인의 사진(1896) 등을 그가 수집한 기록과 함께 나열한다.5) 그는 각기 다른 시간대의 이미지를 수집 및 배열하여 주술·종교의 숭배적 위상, 그에 따른 성질의 간극을 초월하는 (뱀-)이미지의 세계를 선보인다. 향후 그의 연구는 전시 Atlas: How to Carry the World on One’s Back?(2010), 《이미지 인류학, 므네모시네 아틀라스 Image Anthropolgy, Mnemosyne Atlas》(2020)나 그의 도서 분류 체계를 참조한 《좋은 이웃 The Good Neighbour》(2023)로 활용되며, 우리의 시간에 닿는다.

     또한 우리의 과거와 토대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 연구의 사례도 살펴보자. 리움미술관 아카이브 연구 프로그램 《아카이브 이후: 이구열의 기록들》(2026. 04. 10.-11.)은 한국 최초의 미술 기자라고도 불리는 이구열의 컬렉션을 토대로 기록물에 담긴 연구의 지평을 살핀다. 발제자 박소현은 이구열이 남긴 기록물(국방부 종군화가단 견장 기록 카드, 《미술전람회 제1회 北鎭戰(북진전)》 팸플릿 등)과 문서를 살펴 그의 주변부 인물과 시대상을 통해 당시의 문화정치 활동과 고희동이 창설한 조선미술협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다.6) 김해리는 《월남화가 작품전》의 템플릿을 살피며 냉전기 문화정치 상황과 맞물려 발생하는 월남미술인 집단의 정체성을 살핀다.7) 두 연구자 외에도 윤혜준, 권행가, 임정은, 현시원 등은 이구열의 기록을 토대로 우리가 놓인 뿌리와 그곳에서 생성된 기록물이 내재하는 풍경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동시대 미술계 현장에서 작가의 성장과 프로젝트, 이와 함께 성장한 대안공간의 활동을 떠올려보자. 이들에 대한 기록은 실제 창작 환경이 지속되기 위한 토대와 그에 대한 실천의 역사를 살펴보게도 하다. 2016년 9월 인천 개항장 임시 프로젝트로 시작한 임시공간은 전시뿐만 아니라 〈人千始美述觀인천시립미술관〉(2017), 〈로컬 큐레이팅 포럼 2017〉(2017), 〈디지털 아카이빙 툴킷 워크숍〉(2020), 『人千美述인천미술 : 공간의 공간』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작가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과 공간 운영에 대한 사유를 지속적으로 공유해왔다. 1999년 비영리 전시공간으로 시작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는 꾸준한 자체 공모 제도와 기금 마련 전시 등을 통해 작가가 창작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속한다. 그 외에도 2025년 설립된 옷과책은 지속 가능한 출판과 옷에 대한 워크숍을 지속하며, 창작자가 머물 수 있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위와 같은 활동은 각 공간별 홈페이지에 펼쳐 놓은 디지털 기록을 통해 공유되고 있다. 




 

왜 디지털 아카이브인가?

 

이영남 교수의 “개인과 마을의 문화적 토양을 풀무질하는 곳으로 일종의 ‘복합문화공간’ 또는 ‘커뮤니티 센터(community center)’”로서의 마을 아르페(Community Archpe)8)에 대한 논의는, 1999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지자체 및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이천시립기록원과 서울기록원, 증평기록관 등의 영구기록물관리기관이 설립되고 느티나무도서관9), 둔촌주공아파트 아카이브나 우토로 아카이브와 같이 지역·공동체 기반 민간 아카이브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토대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는 이제 어떤 꿈을 꿀 것이며, 그 꿈을 위해 무엇을 지속할 것이냐는 질문이 남는다.

    보존할 가치를 지닌 비현용 기록물 또는 이를 관리하는 기관을 의미하는 아카이브10) 중에서도 미술 작품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록물을 뜻하는 아트 아카이브11)는 국내의 20여 개의 미술 기관에서 구축 및 실행하고 있다. 다만 아르코예술기록원,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백남준아트센터 등 소수의 대형 기관에서만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들 또한 간단한 검색 기구 외에는 이용자가 직접적으로 자원을 활용하도록 지원하지는 못하고 있다.12) 그 외에도 개인이 실제 본인의 아카이브를 구축 및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한정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기록물에 대한 보존과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딛고 있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모든 기록을 원본 그대로 보존할 수 없다면 디지털 공간 안에 기록물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해 나가면 어떨까? 각자의 클라우드에 놓인 폴더를 옮겨 분류체계를 설정하고, 제목과 생산일자, 기술계층과 기록 유형을 살펴 기록물을 식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자명과 출처를 통해 기록물에 대한 추적을 가능케 하며, 기록물의 내용과 정리체계를 공유하여 그 맥락과 연구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자, 생성 일자, 관련 자료 등의 항목은 시스템상에서 연동되며 연구자가 생성한 분류 체계 외부의 관계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13) 더 나아가 리서치 가이드, 검색 시스템 등을 활용하여 낯선 방문자가 기록의 세계를 탐방할 이정표를 세워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기록연구자와 작가가 협력하여 펼쳐놓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동료를 관측하며, 언젠가 찾아올 외부의 방문객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없다는 한계를 마주하되, 본인의 이웃과 자신의 생산물과 생산 방식을 공유한다면, 그렇게 하나둘씩 형성된 마을 간의 교류가 이어진다면, 이는 향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생태가 되어줄 것이다. 

     개별 작가의 기록을 끊임없이 선별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분리된 서로의 세계를 이어보려고 한다. 모두가 단일한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마을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이웃과 관계하며 서로의 체계를 살피고 왕래하는 환경을 꿈꾼다. 기록연구자와 예술 생산자 간의 협업으로 구축된 해당 사이트의 아카이브가 각자의 분류와 이에 대한 수행을 공유하는 사례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설립 배경과 목표

 

본 사이트의 기획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하고 비(B)파운데이션이 운영한 〈미술 아키비스트 양성 교육 프로그램〉(2025.09.12.–2025.10.25.)을 운영진으로 참관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본 프로그램을 통해 기록학 개론과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 사례, 엑셀을 활용한 자료 목록화와 분류체계 설정, 디지털 아카이브의 활용 방안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주변 작가의 작품을 웹 퍼블리싱 소프트웨어 Omeka S를 활용하여 업로드하였다. 해당 경험을 계기 삼아 기관 외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아카이브 시스템과 디지털 아카이브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본 사이트를 구축하게 되었다. 

     또한 EJ 아카이브의 첫 번째 디지털 컬렉션 「임다울 디지털 컬렉션」은 「국제표준 기록물 기술규칙(ISAD(G))」,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아트아카이브 AA_M3_분류·기술 매뉴얼」 및 「AA_R1_등록 메타데이터 작성 매뉴얼」,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국립현대미술관 수집 기록 분류·정리·기술 지침(버전 4.0)」을 참조하여 제작할 수 있었고 웹 퍼블리싱 운영 과정에서 아카이브랩의 공개 매뉴얼과 오메카 포럼을 참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지식 공유에 관한 활용 사례는 기록연구자 개인과 작가가 협력하여 자신이 생산한 기록을 공유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본 사이트는 지식 공유에 대한 실천 사례로 제안되며, 미술계와 기록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앞선 연구자들과 기관의 헌신에 감사드리며, 이와 같은 실천과 수행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해당 사이트가 구축하는 아카이브 컬렉션과 프로젝트는 완결된 결과물로 고착화되기보다, 성장하는 생산자 및 그의 현장에서의 기록물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며 변화해 나가는 것을 지향한다. 기록연구자가 작가의 성장과 활동에 발맞춰 분류를 지속하는 일은 업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업무 기록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 생산자가 협력하여 만든 예술 기록을 보존하는 방안으로도 보인다. 생동하는 기록물과 생산자의 활동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체계를 오가며 순환하는 생태를 기대한다.


 

1) 기록학용어플랫폼의 용어 ‘1차 가치(primary value)’ 참조.
2) 기록학용어플랫폼의 용어 ‘2차 가치(primary value)’ 참조.
3) 아비 바르부르크는 ‘호피Hopi’를 과거 스페인식 표기 명칭 ‘ moqui’로 사용하여 지칭하였다. 아비 바르부르크, 『뱀 의식 -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 (김남시 옮김, 2018)의 25쪽 각주 참조. 
4) 디오니소스의 여성 추종자들을 지칭하는 말.
5) 아비 바르부르크, 『뱀 의식 -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 김남시 옮김, 읻다, 2018, 129-148쪽 참조. 
6)  박소현(2026), 「’이면’의 미술사와 ‘6.25 전쟁: 이구열의 화단사(畫壇史)와 고희동이라는 문제의 기원」에서 발췌.
7) 김해리(2026), 「월남미술인의 탄생: 월남미술인 전시와 냉전기 문화정치」에서 발췌.
8) 이영남(2008),「‘마을아르페’(Community Archpe) 시론 - 마을 차원의 “책, 기록, 역사 그리고 치유와 창업의 커뮤니티”를 위한 제안 -」참조.
9) 느티나무도서관은 2000년 설립되어, 현재는 용인시 수지구에 자리잡은 사립공공도서관이다. 세월호, 좋은 삶을 위한 정치경제, 시민의 탄생, 놀이하는 인간 등과 같이 사회에서 논의되는 주제어를 설정하여 도서를 분류하기도 한다. 2012년에는 이영남 교수와 ‘도서관을 거점으로 하는 마을아카이브’ 강좌를 열거나 기록관리의 기초적인 언어부터 파일의 기술서 내용에 대한 지식 공유 차원으로 ‘느티나무 아카이빙 워크숍’을 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최진선의 「민간 아카이브의 구축과 관리: 느티나무도서관의 사례」(2020)를 참조하라.
10) SAA의 아카이브 용어사전 참조.
11) 이혜린(2024). 현대미술에서의 아카이브 담론과 '아카이브 아트'의 재고찰. 한국기록관리학회지, 24(1), 32.
12) 이지아(2022). 예술기록에 관한 분류·기술 사례 연구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를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74, 82-83.
13) 「영구기록물 기술규칙(Archival Description Rules) 2.0」 5쪽의 기술영역 및 기술요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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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진

예술 기록과 아카이브를 연구하고 다루는 기록학계에 몸담고 있다. 예술 생산과 기록을 오가며 끊임없이 활성화하는 아카이브 구축을 목표로 기록학 석사 과정을 이수 중이며, 기획과 번역, 제작 등 다양한 예술 생산 활동을 겸하고 있다. 미술, 종교, 믿음, 제의 형식,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구체적인 생산물 전반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신진작가 디지털 컬렉션을 구축하거나 아카이브 팀에 연구원으로 참여하는 등 실무에 집중하여 활동 중이다.

개인 프로젝트로 단체전 《HOW TO BETTER YOURSELVES》(2020)를 기획하였으며, 개인전 《트리-트리-트리》 (2021)를 개최하였다. 번역서 『가쿠레키리시탄』과 소설 『숭배의 가치』(2026)를 출간하였으며, 「임다울 디지털 컬렉션」(2026)을 구축하였다.